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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주

백남주

                                             

                                                                       출 처 : 예수교회성도


백남주는 누구인가? 

기독교사가들은  그를  이단자, 신령주의자, 예수교회-성주교회 창설자 또는 배후 인물. 이단종파의 원조..라고 합니다.그러나  백남주를 개인적으로 알고 지낸 인물들은 이미 고인이 되었고 우리가 그에 대하여 아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白南柱는 함경남도 갑산군 출신입니다. 그의 유소년 시절에 대하여는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가족 상황도 모릅니다. 부모의 이름도 모르고 그의 형제들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습니다.

 

중학교까지는 갑산군에서 다녔다고  봅니다. 한 때 弘巖 羅喆(나인영)이 중광한 대종교 신도였다는 말이 있습니다. 3.1 운동 후에 서당에서 학동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고 하네요. 한 때는 갑산군청에서 서기 노릇도 좀 하였다고 합니다. 그가 한문에 소양이 있고 붓글씨도 잘 쓰고 한 것은 그가 어려서 한문을 배웠고 대종교에 있으면서 한문 공부를 더 깊이 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남긴 글이 비판자의 글에 조금 있는데 예수교회와 원산신학산 간판을 백목사가 써서 달았다는 것이 있습니다.)


그가 어떤 계기로 기독교 신자가 되었는지 우리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1927년 경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30년에 졸업을 하였습니다. (입학 연도는 평양신학교가 3년제라는 것을 감안하여 계산한 것이지 정확한 연도는 아닙니다.) 학생 시절에 평양신학교 3대 천재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히브리어 헬라어에 특별한 재능을 나타내서 미국인 선교사 교수가 자기 후임으로 추천하였다고 합니다.


기독교인이 되어 내촌감삼의 무교회지를 애독하였습니다.(1927년에 독자 감상문이 있는 것을 봐서 당시 한국의 내촌감삼 애독자와 무교회주의자들과 직간접으로 친분이 있었다고 봅니다)그는 신학교 졸업 후에 목회자로 진출하지 않고 교육계로 나갔습니다. 원산 마르다윌슨 성경학원에 교수로 부임하여 학생을 가르쳤습니다.


1931년 초에 간도 명동학교 교사였던 한준명을 만나 서로 알게 됩니다. 한준명은 명동학교-은진중학을 나와  명동학교 교사로 학생을 가르쳤는데  그 학교가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넘어가는 과정에서 학교를 지키려 하여 그들에게 사형선고장을 받아 생명이 위협을 받자 부모님의 권유로 누님이 전도사로 일하는 원산으로 온 것입니다. 그 시절 간도에 공산주의가 세력이 커져 여기저기 살인 사건이 일어나 분위기가 살벌하였다고 합니다.

 

백남주는 이용도 목사와 동갑이라고 하니 1901년생인가 봅니다. 백과사전에는 1902년생으로 나오는데 예나 지금이나 실제 나이와 호적 나이가 1-2년 차이 나는 것은 예사이니까 이용도와 동갑이라는 구전이 더 믿을 만합니다.


두 사람이 만나 서로 의기상통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성서와 성서 언어에 남다른 재능과 학구열이 있었고 영계 천국과 지옥 영들의 활동 인간의 영과 육의 관계에 유달리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선다싱 스베덴보리의 책을 읽고 새로운 자극을 받습니다.

 

*백남주와 한준명이 처남 매부 간이라는 통설은 사실이 아닙니다. 백남주 목사의 부인 역시 한씨였기 때문에 동성동본으로 한 집안이라고 하는 것이 처남 매부지간으로 잘못 알려진 것입니다. 한준명 목사의 누님은 한의정 복음사입니다.(장로교 전도사였다가 예수교회 복음사로 활동) 1931년 초에 두 사람이 처음 만났습니다. 전에는 모르던 사이입니다. 한의정씨는 원산에서 전도사를 하였으므로 백남주 선생을 동생보다 먼저 알았을 것입니다. 아마 누님이 소개해 주어 백선생을 만난 것 같습니다.

 

** 이용도 목사가 원산에서 백남주 한준명 등 원산 지방의 기도인들을 만난 때는 1931년 7월 중순이었습니다. 그 시기에 그는 스베덴보리를 소개 받았다고 합니다. <신지와 신애>라는 책을 이 때 빌려 본 것 같습니다. 이용도 목사는 교회사가 교리 투쟁으로 얼룩진 것을 싫어하여 스베덴보리를 소개 받고서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합니다.


반 년 정도 지난 후 다시 만나서 스씨가 사랑의 사람이라며 호감을 표했다고 합니다. 이용도와 백남주의 만남은 1931년 여름이었습니다. 그 해 9월 중순 삼방에서 다시 만났고...1932년에 그들과 인간적 우정과 신앙적 동지애가  점점 도타워져 갔습니다.  또 이 시기에 원산에서 예언은사를 받은 여신도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용도 목사는 1932년 2월 원산에 갔을 때 처음 입류라는 것을 직접 체험하였다고 합니다...원산 사람들을 여선지파라고 하는 이유는 그들이 이 여신도들과 친하고 그 예언을 듣고 주님의 은사라고 믿은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1933년 장로교 총회로부터  이단 판정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여선지파라는 용어는 기독신보에서 쓴 것이고 그들 스스로 무슨 파를 조직하고 이름을 만들어활동한 것은 아닙니다. 이웃으로 신앙동지로 상호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습니다.



백남주는 예수교회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1932년 여름 <새생명의 길>이란 제목의 책자를 발행하였습니다. 60페이지 정도 500부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 책자를 몇 사람이 읽엇는가 그 내용이 무엇인가? 아무리 궁금해도  그 책자가 없어져서 그 실상을 알 수 없게 되었고-기독신보와 신앙생활지에 단편적으로 나오는 비판 반대에서 그 내용을 모호하게 유추하는 정도입니다- 장로교 소속 신학교수(원산 마르다윌슨 여신학원)가  칼빈주의 신학과 아주 다른 스베덴보리의 신학을 소개한 글이 있었다고 봅니다.


이렇게 보면 백남주 한준명 들은 교파 관념이 그리 강한 사람들이 아니었나 봅니다. (선다싱 스베덴보리 아켐피스 등을  읽은 것으로 보아..) 


양노회가 이용도의 평양 출입 금지를 결정하고 기도단은 해체 위기에 놓였을 때 기도단 특별집회를 신행상회에서 열기로 하였습니다. 1932년 11월 초 평양기도단의 집회에 원산에서 한준명 전도사가 강사로 갔는데 이 집회로 말미암아 평양노회에서 집회와 연관된 인물들을 조회하고 그들을 출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백남주 한준명 등 원산 지역 교역자들, 이조근 이종현 김지영 등 평양기도단 평신도들...그리고 감리교 경성지역 교역자 이용도 목사...이용도 목사가 10월 말일에 원산에 가서 백남주 선생과 의논하여 한전도사를 강사로 파송하였는데...평양 집회에서 예언 방언 신유 등 신령역사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계기로 기도단을 해산하고 이용도를 밀어내고 동조자들을 쫓아낸 것입니다.)


1933년 1월 3일 예수교회 첫 집회가 그의 집에서 있었고 1933년 6월 창립 선언이 나오는데 그 때 예수교회 발기인 대표 3인 중 한 사람입니다.(이용도 백남주 이종현) 

*백남주를 예수교회의 창립자 혹은 배후인물로 보는 기존의 통설에 필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예수교회는 어느 한 사람이 주동하여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1933년 9월 9일에  원산 예배당의 담임과 신학산 수도감에 취임하였습니다. 예수지가 창간되자 시 수필 설교 주일공과 번역 `그리스도를 본받아서`를 게재하였습니다. 이렇게 충실히 일하던..백남주 목사가 1934년 가을에 돌연 예수교회 공직을 사퇴하고 은퇴하였습니다.(원산 예배당 담임 목사 및 원산 신학산 수도감)  그 이유는 그의 개인사정 즉 가정문제로 인한 것이지 예수교회 안에 있는 양대 파벌? 평양파와 원산파의 행정적 대립 교리적 갈등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교회 안에 평양파와 원산파가 있는데...평양파는 기도단 중심의 장로교 출신 평신도들이고 원산파는 스베덴보리 신학, 입류파 장로교출신 교역자들이라고 하여 상호 반목하고 대립하였다는 식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선도감 이호빈 목사가 서둘러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교회에서 내보냈다는 설을 필자는 지지하지 않습니다.

 

1933-4년에 평양 하수구리.평양 동대원리(베다니) 평천리, 명촌  평원군-송양리(동촌) 숙천(상칠)  순안 암적(석암이라고도 함) 한천 안주군-안주읍  용흥리(오도산 기도소)  금계리 용강군 갈현리  대동군- 안학궁기도소, 황해도- 해주 황주(노동기도소)  용매도 함경남도- 원산(원산) 문천(문천. 생포리) 덕원(송흥예배당) 영흥(영흥기도소) 등지에 예수교회 예배당 기도소가 16-17개 정도 1000 명 가량 교인이 되었습니다.

 

60년 만에 찾아 낸 <예수>지에  소식란이 없어진 부분이 있어 정확한 통계는 아닙니다. 거기에 무슨 평양파와 원산파가 있었겠어요?  평안도 지역 지방회는 1933년 8월에 생겼고 함경도 지역 지방회는 1934년 9월에 가서 시작되었습니다. (6개 교회라고 하니 서선지방 교회수에 비하면 반 정도 될까요? 그런데 얼마 후에 중추적인 교회 원산예배당이 백목사의 사퇴로 인하여 예수교회에서 떨어져 나간 이후 덕원군 송흥,  문천군의 문천, 같은 군의  생포리 예배당과  강원도 이천군 가려주 예배당 영흥군의 기도소 등이 예수교회에 남게 됩니다.


다시 말해 원산만 백목사와 함께 예수교회에서 탈퇴한 것입니다. 그가 분열을 획책하고 교권을 장악하려는 야망이 있었다면 원산에서 자기 세력을 부식하였다가 몇 교회와 함께 예수교회를 탈퇴하였던가 2회 공의회에서 선도감직에 도전하였을 것입니다.그러다가 안 되어서 나갔으면 헤게모니싸움이겠지요....)

 

1935년 봄에 `聖主교회`라는 새로운 교회가 생깁니다. 이들은 1920년대에 평안북도 철산군에서 김성도라는 여신도를 중심으로 하여 모이던 신앙그룹인데...김성도 씨는 철산군의 부자 정씨 집으로 시집 갔는데..시댁에서 그녀가 예수 믿는다고 온갖 박해를 하였답니다.


남편이 후에 회심하고 자녀들에게 너의 어머니가 주님이라고 하였다 해서 .... `새주님`이라는 말이 나왔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그녀는 예언과 신유 능력이 있었다고 합니다...평북노회에서 이단시되어 정식 교회는 못 되고  유별난  소그룹으로 지내오다가 평양에서 예수교회라는 새 교단이 설립되자 1933년 가을에 가입을 하였습니다. `철산군 부서면 장좌동`에  장좌예배당이라는 이름이었고 복음사는 김성도씨의 큰 아들 정석천씨,  교인수는 130 명 정도라고 합니다.


(예수교회에 가입을 표명하면서 이호빈 목사 백남주 목사 이종현 복음사 들이 가서 집회를 인도하고 그들의 가입 의지를 물어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교회가 평안남도와 황해도에 10개 정도 있는데 철산이 평안북도로 진출하는 교두보 역할을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김성도씨를 새주님이라고 부른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을 철산파. 새주파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들은 집회시에 열광적으로 기도하고 춤을 추며 자기 그룹에서 만든 성가를 불렀다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교회에 가입한 후에도  자기들의 주장 집회 방법을 고치지 않았습니다.


(주일 예배 끝나고 나면 그들이 그런 식으로 집회를 하니 교회 안의 또다른 교회가 생기는 현상이라....예수교회가 그들의 변칙적 행태에 더이상 인내와 관용을 하기에  한계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들의 교리도 예수교회와는 아주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 `에덴 동산에서 하와가 뱀에게 유혹되어 선악과를 먹은 것을 해석하기를 하와가 천사장 루시엘(=루시퍼)과 성적 접촉을 하여 타락한 것이다` 하는 것이 여기서 나온 주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재림 예수는 한국에 오신다고 주장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의 뿌리가 외국인지 아닌지는 아직 모르겠고...그들은 김성도 씨가 계시를 받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오늘날도 아와 유사한 교리를 가진 종파들이 있습니다.

 

결국 철산파는 장좌예배당으로 예수교회에 산하 지방 예배당으로 가입한 지 1년여 만에  떨어져 나가 성주교회라는 새로운 교단을 창립하였습니다.


이 때 평양 안주 숙천 등지에서 예수교회 교인들 가운데 몇몇  사람들이 성주교회로 갔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 백남주 목사는 슬프고 괴로운 상황이었습니다. 


1935년 봄  부인이 병으로 죽고 아들도 죽었습니다. (동시적 사건인지는 미상)  예수교회에서 이미 작년 가을에 사임한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괴롭고 슬프고 또한 외로운 때에 철산 사람들이 새 교단을 설립하는데 그를 초빙하여 布道監으로 추대한 것입니다.


그들은 새 교단  설립에 대표자가 될 만한  목사가 필요하였을 것입니다. 마침 백목사가 있어 초청을 하엿을 것입니다. 예수교회 평양 明村예배당 담임 金宅甫 목사도 성주교회로 갔습니다. 이것을 보면 당시 예수교회 초창기에 참여한 교인들 가운데  교리적인 면에서 예수교회와 성주교회의 차이를 구분하지 않고 교인들이 열렬하다.  지도자가 능력있다 하면  이런 점에  더 매료되어 몰려가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백남주 김택보-예수교회에서 안수 받은 1호 2호 목사들이 무슨 이탈하니 자연 교인들도 따라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남주의 생활 근거지는 원산이었고 성주교회는 주로  평안도에서 활동하였습니다. 평안북도 철산군 평안남도 평양부.. 성주교회는 정석천, 김택보 두 사람의 지도 아래 활동을 하였다고 봅니다. 함경남도 원산 전 예수교회 예배당이 성주교회로 간판을 바꿔 달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럴 개연성은 있습니다. (예수교회에서 사임한 후에 그 교회 건물은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필자는 교회 선배들에게 묻지 않고 지나갔는데-과거사의 아픈 부분을 이야기해 달라고 조르는 것이 예의가 아니고 철 없는 행동 같아서 상당히 자제하였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들려줄 분들이 다 고인이 되셨으니  이제는 누구에게 물어 볼까? 아무도 없군요...위의 글은 필자의 추리입니다) 함경북도에도 성주교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함북 교인들 중에  신령파라 하여 기성 교회에서 배척을 받은 이들이 먼저 예수교회에 가입을 하고자 한 바 있었으나  여러 사정이 있어 실현되지는 못하였고 그러다가  그들 중 일부가  성주교회를 선택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아마 백남주 목사의 영향력이 함경북도에 있는 이른바 신령파에게 미쳤던 것이 아닌가 이렇게 추리합니다.(백목사는 함경남도 갑산군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신학노선이 성주교회와 같았을까? 아마 같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를 높이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 섰던 그인데 개인을 신성시하는 성주교회의 신앙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쨌든 그 후에도 그의 가족들 중에 병으로 인하여  죽이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따지고 보면 그는 예수교회와 성주교회 같은 새로운 교단 창립에 나섰고 교계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나 실상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고 개인적으로는 가족들과 사별하고 자신은 병에 시달리며 심신이 괴롭고 힘든 종교인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월남하여 공주사범에서 문화사를 가르치던 중 1949년(48년이라고 한 곳도 있음) 병사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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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필자의 의견입니다.


그가 이단인가 아닌가 판단기준이 각각 다르니 그 평가도 다를 것입니다.


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1933년 9월 이용도 한준명 백남주 이호빈 등 예수교회 창립 주동인물들과 황국주를 이단이라고 결정한 이래 그 판정은 70년이 지난 오늘날도 유효한가 봅니다. 윤리도덕적 기준으로 볼 때 세상에 흠없는 사람 실수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그가 그렇게 사악한 종교인이었나? 그가 일본에게 아부하여 교계에서 출세를 하였던가? 교인들의 헌금을 착복하여 사복을 채웠던가?

 

이단이란 교리적 교회 행정적인 문제인데....그가 입류 예언을 예수의 말이라고 인정하여 신약 이후 계시와 기적을 부인하는 교리와 다른 주장을 하여 이단이라면 하는 수 없이 그는 이단일 것이고 스베덴보리의 신학설을 지지 수용하여 그것을 가르치고 퍼뜨려서 이단이라면 그것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백남주 목사가 남긴 글은 예수교회 중앙선도원 발행 <예수>지 1934년도 1년분에 실린 글이 유일할 것입니다. 그외에 성주교회에 옮긴 후에 몇 가지 글을 써서 책으로 냈다는데 실물이 전해오는지 여부를 알 수 없습니다 필자는 공정한 심정으로 <예수>지에 실린 백남주 목사의 시 수필 성서명상을 읽어 보았는데 그 글에서 이단성을 찾아 내지 못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을 부인하였나 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부인하였나 성령의 역사를 부인하였나 다시 말해 삼위일체에 이단적인 것이 있나 찾아 보았습니다.


기성교단에서는 예수교회 좁혀서 원산신학산 더 좁혀서 백남주 한준명 등이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하고 예수의 육체 강림을 부인하고 성부수난설을 주장하였다고 하는데....그것이 정말입니까? 필자는 소년 시절로부터 한준명 목사의 설교를 들었고 그분의 글을 읽은 사람입니다. 교회사에 관련된 것이나 교리적인 난제에서 의심 나는 부분은 질문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위에서 말하는 삼위일체 부인- 형상론적 이단설. 가현설. 성부수난설을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교회와 한준명 목사를 모르는 이들은 처음에는 그렇게 이단설을 주장하다가 이단론에 걸리니까 그것을 철회하였을 것이라고 상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한국기독교사회에서 용납 받지 못할 이단이었다면 어떻게 일본 관서대학 신학과에 유학하였으며(일제 시대에) 또 연희대학교 교수와 중앙신학교 학감 교목을 할 수 있었을까 여러분 한 인물을 연구 평가할 때 선입관을 버리고 잘 살펴 보기 바랍니다. 모르면 자기보다 그 인물들을 잘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백남주는 원 모습보다 과도하게 선전된, 왜곡된-  아니면 베일에 숨어 그 정체를 모르는  사람으로 70년을 지내온 것 같습니다. 이제 그가 세상을 떠난 지 58년입니다. 이제 그의 영혼을 놓아 주어도 되지 않을까요 무엇이 그리도 못마땅한가요 지난날의 기록을 재탕 삼탕하고 거기에다 덧붙여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가 남긴 것이 무엇입니까? 그의 사상을 이어받은 교회나 학회나 종교단체가 있습니까? 그는 예수교회와 성주교회 창립에 관여하였습니다만 예수교회는 만 일 년만에 나왔고 성주교회에서는 주류가 아니었다고 봅니다. 그저 외로운 종교인으로 살다 갔습니다.


해방 후 월남할 때 아들 하나만 데리고 왔다고 합니다. 부인은 해방 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공주에서 교편을 잡고 지낸 시절 시편을 히브리어 성경에서 우리글로 옮기는 일을 하였다고 하는데 완성을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아들이 지금 나이가 60대 중반 정도되었을 것인데...그의 후손에  대하여는 필자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혹 그들이 인터넷에서 필자의 글을 읽으면 예수교회라는 교회가 아직 남아 있고 기성교회의 이단론과 달리 자신의 부친ㅡ 조부를 객관적으로 그리고 긍정적으로 평하는 논자도 있구나 하고 생각할는지 모르겠군요.


필자는

백남주를 예수교회의 신앙 선배 중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이 글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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